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2세 (문단 편집) ==== 위기에 맞지 않는 지도자 ====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면 주변에서 흔히 볼법한 인싸력 넘치는 쾌남이자 화목한 가정의 행복한 아버지, 평판 좋은 신사 정도로 편안한 인생을 살다 갔을 사람이었고, 더 나아가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러시아/역사|러시아 역사]] 전문가인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 교수는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동시대 [[영국]]의 국왕이었다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모범적인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라고 했다.]였다면 어느 정도는 나은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니콜라이 2세의 지위는 [[전제군주제]]의 끝판왕이었던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앞장서서 황실과 나라 전체를 이끌어 가야만 하는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였고, 당시의 시대조차 내부로는 그동안 썩혀 온 여러 문제가 곪을대로 곪아 러시아 전체가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며 외부로는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과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격동의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소탈하고 선량한 성격에 가정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한 본인의 장점이 오히려 러시아에서는 [[역효과]]를 냈다. 당시 러시아 궁정은 황제 일가가 사교계에 자주 다니거나 공식 석상에서 위엄을 보이는 것을 통해, 황실의 신성성을 민중들에게 각인시키는 동시에 귀족들의 지지와 인기를 얻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 부부는 [[소시민]] 성향답게 굳이 자신들의 [[사생활]]을 드러내거나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외아들 알렉세이 황태자가 혈우병 환자로 태어나자 이를 숨기고 아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공식 행사가 아니면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었다. 황제 부부에게 시대상 당연하게 요구받는 의무를 거부한 것이었다. 게다가 부모의 폐쇄적인 모습은 자녀들에게도 악영향을 주었다. 황녀들은 자기들끼리만 뭉쳐 지낸 탓에, 성년이 다 되어가 [[사교계]]에서 여러 또래 귀족들과 만나 친분을 쌓아야 할 나이가 된 뒤에도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놀고 자신들의 공식 칭호조차 낯설어하는 지경이 되었다. 한마디로 니콜라이 2세는 '''나잇값 못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로 자식들을 키워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때문에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같은 황족들 사이에서도 자기들끼리 모여 노는 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 부부에 대한 평이 정말 안 좋았다. 니콜라이는 노트 52권 분량의 방대한 [[일기]]를 남겼는데, 즉위 전부터 처형당하기 2주 전인 1918년 6월 30일까지 계속 썼다. 이 일기를 봐도 그의 그릇이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영토를 가진 나라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제왕의 그것이 아니라, 소시민의 감성을 가진 나약한 범부 수준이었다는 것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압사사고가 난 즉위식이나 피의 일요일 사건, 러일전쟁의 중요 전투와 같은 여러 중대사건은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식의 서술로 일관한 반면, 자기 가족들이나 친척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사는 상세하고 다정다감하게 기술했다. 그러니까 니콜라이는 백성이나 제국의 안위보다는 오직 본인과 측근의 일상사가 본인의 주된 관심사였던 사람이었다. 이런 그에게 전제왕권은 너무 버거웠고, 그 결과 300년 사직의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고 본인과 가족도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